남한산성  

-코스모스 계절에 민들레를 그리며-

 

최명길과 김상헌, 현실론과 이상론, 척화론과 주화론 그리고 민들레.

영화는 다큐가 아니다. 영화의 묘미중 하나는 다큐가 아님으로서 넣을 수 있는 문학적 여유와 재량이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또 해석은 관객의 몫이니 그리 부담스러워 할 것도 없겠다. 그리하여 영화는 영화로서 또 하나의 인문학적 장르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시청각 미디어다.

그림 속에서 바람소리를 듣고, 음악 속에서 달빛을 보는 것도 그 컨텐츠가 갖는 함의의 매력이겠지만, 영화는 직접 보여주는 직유의 매력을 갖기에 더 대중적 일 수 있고, 시청각으로 동시에 유인하는 몰입적 기능을 통해 다큐를 재구성할 수 있어 나름 강력한 장점을 갖는다 하겠다.

민들레, 노아홍수에 발이 빠지지 않아서 달아나지 못한 꽃, 그래서 하얗게 머리가 시어버린 꽃, 가을꽃 코스모스가 나르시즘이라면 봄의 대표 꽃인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와 행복이다.

"봄이 온 것을, 강물이 녹을 것을 어떻게 아니냐? "고, 그것은 "민들레가 필 때"라는 할애비 잃은 손녀딸의 대사에서 관객은 민초들의 희망과 염원 행복을 동감한다. 도망하지도 못하는 민초, 그들은 그렇게 역사속에서 봄과 행복을 기다리는 것이다.

김상헌, 그는 안동김씨의 자존심이 되었듯 목숨을 걸고 척화론을 주장하여 절개와 지조를 지켜내고자 한 인물, 청에게 길을 안내하고 손녀 살릴 푼돈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강 길을 안내하는 노인을 그냥 둘 수 없어 베었으나 성으로 흘러들어온 그 손녀 딸에게는 자신이 굶어가면서도 떡국을 먹이는 인간애.

주화론의 최명길 또한 목숨따윈 아까워하지 않고 현실론을 펼친 인물, 조선의 사대부들은 기어코 김상헌만을 인조 묘에 봉양했다지만, 광해를 폐위시킨 일등공신이자 또한 권모술수에 능한 모사꾼이라 평가받아도 그도 제 아비가 광해군 시절 고초당한 연유이니 역사는 그리 쉽게 누굴 평가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영화의 해석이 관객의 몫이 듯 역사의 해석또한 각자의 몫이다. 명분에 매여 실리를 놓친, 결국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그 '명분'이라는게 왜 존재해야하며, 그 명분만 부여잡은 조선의 절개 아닌 절개가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갔는가? 임난 때 도와준 아버지의 나라 명,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다". 그 결과가 자기백성의 피폐함과 요절이라면 그 명분은 과연 무엇을 위한 명분인가.

정치는 생태학이다. 약육강식, 명분지키다 자신의 손녀 딸이 오랑캐의 노리갯 감이 되었다면, 목숨보다 자손보다 소중한 것이 의리와 절개일까? 목숨을 보전해야 절개와 의리도 가능한 것 아닐까? 이병헌과 김윤석 두 배우의 논리 다툼이 끝까지 이어지는 것은 이 영화의 당연한 과제이며 선택일 수 밖에 없다.

결국화친으로 형제의 의를 다시 맺고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역사 상 가장 큰 치욕을 남겼음에도 5만이 머나먼 타국 땅으로 끌러 갔을 바에야 결사항전으로 맞서 모두가 조선의 혼을 살려냈어야 한다는 예조판서의 주장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명에 대한 충성심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우리 역사에서 임금도 한번쯤은 전쟁터에서 민족의 자존으로 죽어갔다면, 임금이 나랏님이란 그 허울을 손수 한번쯤이라도 깨어버린 왕이 있었다면 오늘의 한민족역사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의주로 강화도로 러시아 공관으로 늘 제 한목숨 구걸하듯 피신 다닌 조선 왕들의 역사에서 한줄기 쉼터 같은 긴 한 숨같은 임금의 백성을 향한 절개 말이다.

손녀딸 키워낼 할애비는 국익 혹은 종묘사직을 의해 희생시킬 수 밖에 없고 그 손녀딸은 거두어 민들레 피는 봄날 연날리려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마무리 하고 있다.

물론 김상헌이 자결한 것은 영화가 영화로서 각색이며 그와 최명길은 모두 청나라에 끌러갔고 후에 귀환했다.

영화의 시각처럼 백성이 피해자이고 권력자들이 가해자만은 아닌 것이 역사다. 둘은 공동운명체이며 때문에 그리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어쩌면 피해의식 속으로 숨는 도피적 시각일 수도 있다. 역사는 누구나 주인이어야 한다. 영화 남한산성은 영상물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였고 그 안에 우리의 뿌리가 있음은 결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편하게 놓아두지 않는다.

코스모스가 가을의 꽃인데도 나르시즘이며 민들레가 봄꽃임에도 행복인 것은, 이 가을 다시 돌아봐야 할 지난봄의 기억이다. 우린 행복을 그리워하며 나르시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민들레가 무성생식을 하는 특이한 꽃이 듯 그렇게 홀로 견뎌내야 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와 개인의 숙명이 아닌지,

여하튼 외면할 수 없는 역사 속에서 관객은 아름다운 꽃과 역사가 모두 현재의 것이라는, 그래서 사극은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을,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코스모스 핀 이 계절에 민들레를 그리며, 결국 자립의 역사는 주화론도 척화론도 아닌 힘만이 그 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재음미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