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언어

- 침묵의 으로 쓰는 편지  -

침묵은 말 이상의 말이다. 말로 하는 순간 고요가 깨어지고 온전함이 구멍 나기 시작한다. 말하는 순간 오로지 오감으로 전체로 다가오던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청각만 남는다.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들이 말하는 순간 말 외에는 모든 것이 막힌다. 그 말의 내용에 갇혀 오감이 닫힌다. 말하는 순간 온전한 만남은, 온전한 소통은 끊어진다.

말과 글은 계약관계, 지식전달의 경우에 유용한 도구이다. 침묵의 언어! 그게 참 좋다. 그럼 강의는 왜 듣고 설교는 왜 하는가, 그것은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관한 것이다. 진리 내지는 지혜를 말로 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말하는 자의 착각이다.

침묵은 여백이다. 일손을 멈추고 불어오는 바람, 떠가는 구름, 그리고 솔잎의 향기와 종달새의 노래를 듣는 것이다. 침묵의 언어는 말 너머의 말이다.

사람이 누구를 만나서 그 사람이하는 말에 귀 기울이느라 정작 말하는 사람의 표정과 눈의 떨림, 입가의 미소, 체취 이런 것들을  느끼지 못하면 그건 그의 전부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침묵으로 하는 말, 눈으로 하는 말, 느낌으로 하는 말이 더 온전한 말이다. 머리를 상대의 어깨에 기대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더 깊은 연인간의 언어이다. 말을 하는 것 보다는 손을 잡고 온기가 전해 옴을 느끼고, 가만히 바라보면 말보다 수십 배의 전달과 느낌이 될 일이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 혹은 그의 몸짓과 말투 숨소리... 이런 것들과 더불어 상대의 맘까지 느낌으로 전해 받는 것, 그것들이 온전한 언어가 된다.

물론 인류의 문명은 말과 글로 기록되고 보관되고, 이런 축적을 통하여 문명과 문화는 발전 전개되어 왔다. 문자와 말을 발견하였기에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과연 말과 글이 인간을 행복하게 했을까?

말로 전달하지 않은 분들... 모짜르트, 바하, 베토벤... 단테, 괴테, 세익스피어... 고호, 미켈란젤로... 소설 시 연극 음악 그림, 소설과 시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은유의 언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자. 이런 걸출한 작가들의 작품도 자연보다 더 나을까?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보다 나을까? 한사람의 인생보다 연극이 나을까? 꽃의 오묘함보다 미술이 나을까? 모든 맛을 합하면 무맛이 되고 모든 빛의 색깔을 합하면 무채색이 된다. 햇볕은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 온갖 색을 포함한다. 물맛이 무맛이라지만 어쩌면 모든 맛이 다 들어 있으리라. 어떤 그림 어떤 기교가 한 송이 꽃보다 나으랴.

어쩌면 대작들은 오히려 우리가 온전히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게다. 부분만 잘라서 확대해서 보여주는 기법들일게다.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게 해줄 뿐, 결국 부분집합 그 부분집합들 일 뿐, 그래서 침묵이 온전한 언어다.

정말 상대와 소통하고 싶다면 말하지 말고 느껴야한다. 슬픔과 분노와 기쁨과 환희를, 애절함과 한과 미련을, '말을 해야 알지'가 아니라 '꼭 말을 해야 아나?' 가 맞다. '말 많은 사람치고 실속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저녁 창문을 열고 중천에 뜬 달을 그냥 가만히 보는 것. 그 달빛을 온몸으로 받는 것, 불어오는 가을바람 속에, 달빛 속에 귀뚜라미 소리 속에 가만히 서 있는 것, 그건 가을밤을 만나는 것. 어디서  바이올린 소리 들리면 구슬프게 느끼겠지만 그것은 원래 자연 속에 있는 슬픈 가락과 느낌을 잠시 문을 열어 줬을 뿐, 모두 가을바람소리에 들어 있는 것. 아침 창문을 열면 밝아오는 여명과 창가에 이는 새소리, 나뭇잎에 반사되는 햇볕, 그게 온전함이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아마도.

완성된 맛과 소리와 그림을 보려면 한 잔의 물을 마시고 아침 햇볕을 받으며 창문을 열고 아침을 느끼면 될 것. 슬픔도 기쁨도 노함도 분명히 어디 하나쯤이 부족할 때 생겨나는 감정들 일 터..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한용운의 님은 침묵하였기에 '님'이다. 그 님이 말을 했으면 이미 그는 이미 님이 아니였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오솔길을 따라 가버린 님. "잘 있어 !" 하고 간 것이 아니다. 말없이 간 님이기에 푸른 산 빛과 긴 오솔 길이 남았다. 한용운의 시가 침묵으로 말하지 않았다면 우린 그 시를 읽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의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본 것. 무의식이라 표현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 표현하고, 언어의 한계라 표현하고, ‘그림이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틀렸다. 이미 말로 설명하고 있기에... 그래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은 ‘침묵’, 백번 양보하면 '아마도...!' 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