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등> 

ㅡ 미적대는 시간앞에 앉아 ㅡ  

무겁고도 가벼운 아침이 왔다. 주마등 같은 날들이 지난다. 이전의 속도야 주마등(走馬燈)이지만 요즘이야 시속 백키로는 기본이다. 주마등! 사실 그건 꽤 낭만적인 단어다. 주마등은 달리는 말 위에서 바라보는 불빛이라는 말(言)아닌가. 말(馬)을 탄 이는 마을을 지나는지, 아님 호롱불 새어나오는 어느 산골 민가를 지나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왜 그리 급히 달려야 하는지 모르지만... 예나 지금이나 ‘주마등같은 삶’에서의 주마등은 삶은 늘 바쁘고 시간은 저 혼자 급히 가고 있다는 느낌을 표현 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급히 가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미련, 아쉬움 뭐 그런 것을 표현한 상징적 언어리라.‘주마등’은 어쨌든 낭만적이지만 도시의 삶은 그런 낭만도 없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빌딩사이로 뜨고 지는 해와 달을 바라보며 언제 시간은 저 혼자 저만치 가버렸음을 문득 느낀다.  아니 도시의 삶은 해와 달을 볼 기회도 주지 않는 것 같다. 가끔 올려다 보이는 그들이 생소하고 낯설다. 꼭 시골에 있어야 할 것들이 도시로 출장 나온 듯 그렇게 도시는 늘 ‘타인의 마을’이다.생존을 위해 돈 때문에? 권력 때문에? 어떻게든지 도시의 하루는 간다. 권력, 돈! 참으로 케케묵은 싫증나고 지겨운 주제다. 그건 잠시도 비켜서지 않고 연인의 집을 지키는 사나운 개같이 늘 웅크린다. 그리고 시간은 주마등처럼 아니 KTX 등처럼 지난다. 급히 달려야만 하는 시간, 그리고 그 길이 꽃길만도 아니다. 황무지도 있고, 돌밭 길도 있고, 어떨 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길도 있다. 그렇게 힘겹게 홀로 가는 것이 숭고한 사명인 '사는 일'같다. 행복에 겨워, 감사에 넘쳐서, 혹은 그리움이나 희망에 부풀어서...그것은 겨울날의 햇살처럼 잠시 스치고 지나고 나머지의 긴~ 시간들은 자신의 길을 수용하는 것, 타인의 길을 돌아 볼 것도, 자기의 길을 운명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보편적인 현대인의 삶, 도시인의 삶처럼 보인다. 도시인은 빌딩사이로 잠시 부는 바람으로? 높은 건물에 반사되는 햇볕으로? 신호등 기다리면서 바라보는 출장 나온 달을 보며?  그렇게 위안 받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현재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미련으로 그렇게 하루를 마주하는 듯하다. 꼭 자다 깨다 한 지난밤처럼, 쇼윈도에 걸린 시계처럼 그렇게 미적대는 시간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이래서 무의미로 지나가 버린 시간을 어느덧 되돌아보며 습관처럼 내 뱉는 말들이  "세월 참 빠르다" 이다. 그것이 곧 주마등이다.  오늘은 유난히 그렇게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이 이는 아침이다.

그래도 그렇게만 주마등을 곱씹고 있을 수는 없다. 주마등같은 삶에서도 의미를 찾는 방법 몇 가지 궁리해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늘 먼저 보는 것이 고등학교 단톡방이다. 여기 친구들도 이미 이순을 넘긴지도 두어해... 굽이굽이 고개를 너머 먼 것 같았으나 어느 듯 지나가 버린 세월, 이제 이순을 넘기고도 계속 나이는 급히 가고 있다. 왜 그리 서둘러 가는지 물어봐도 돌아 아니 보고 가는 다리위에 스님처럼 간다. (물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난대 물어 보자, 막대로 흰 구름 가라치고 돌아 아니 보고 가노 매라) 어느 친구가 현 대통령에 대한 글을 올렸다. 한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정치는 선거 때 하잔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나타난 친구를 모두들 반가워한다. 한 친구는 클래식 오페라 가곡 등을 자세한 설명이나 사연을 곁들여 올린다. 이 단톡방에서는 가끔 향기가 난다. 서로 보듬고 안고 이해하고 수용하며 익어가는 가을 내음이 난다. 노랫말이라는 것이 그냥 노래만 듣는 것과 스토리가 가미된 것은 천지차이다. 그냥 노래만  한 곡 보내주면 듣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음악을 올리는 이 친구 늘 스토리를 같이 올린다. 이 오페라는 어느 시절 작곡가가 애인을 잃고 슬픔에 빠져, 혹은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그 감사와 기쁨을 전하고자... 이렇게 스토리를 가미한다. 이 날은 어찌 우리의 포크송을 올렸다. 또 곡명하나 띄운 것이 아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를 붙였다. 

 - 커피가 주는 행복감/ 용혜원 -커피를 마시기 전 먼저 향기를 맡는다/키스를 하듯 입술을 조금 적셔/맛을 음미한다 /삶도 허둥지둥 살며 /뭐가 뭔지 모르고 살아갈 때가 있다/우리들의 삶도 향기와 맛을 /음미해 가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행복이란 그 느낌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음미하며 살아가자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음미하면서 귀에 익은 우리 가요 한 곡 들어 보시죠. 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입니다”커피 한잔을 마셔도 음미 하며 마시라고, 그것이 시인의 권유다. 동창생의 권유다. 짧지만 참으로 화려한 것이 삶이다. 우린 밤하늘의 찬란한 별무리를 언제 올려다 보았던가? 우린 첫 눈을 언제? 눈 싸인 곳에 첫발자국은 언제 찍어 보았는가? 겨울달이 창공에서 홀로 찬 바람에 스치는 것을 언제  보았던가?  나무들이 빈가지에 눈을 얻고, 산하가 흑백사진으로 변해있던 것을 언제 보았던가, 눈 오는 날, 눈 내린 날의 사진은 흑백으로 찍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언제 느꼈던가? '이순(耳順)'을 너머 '불유거(不踰距)'로 가는 나이, 단톡방에서 동무들의 인품을 느낀 하루 그 하루 또한 참 아름답지 않은가.  

방법 둘.

모 방송에서 '생명'이란 주제로 지리산 골짜기 어느 혼자 사는 할머니의 주변에 생명들을 보여준다. 물소금쟁이, 개울 속 물고기, 고양이들의 영역전투, 병아리의 부화, 그리고 스무 살에 시집와서 늙어버린 할머니가 처녀시절 사진을 보며 "나도 이럴 때가 있었지, 그때가 제일 좋았던 거야" 그리고 이어지는 "짧지만 참으로 화려한 생"이란 멘트가 귀에 들여 온다. 갓 깨어난 병아리가 쳐다보는 밤하늘의 별무리와 함께...그래 삶은 참 짧다. 그러나 어찌 보면 너무도 화려하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사연을 갖는 것, 이전에 글에서 그리 적었었다. 닭을 키워보면 모두 성질과 개성이 다르다고, 보통명사의 닭이 아니라 특별한 하나의 개체, 즉 고유명사가 된다고, 그래서 닭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밖에 없다고, 그렇게 세상만물들은 모두 스토리를 가지고 산다. 바위하나도 긴 세월이 들어 있다. 긴 얘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one of them’ 이 아니라 ‘only one’이 된다. 스스로 그 엄청난 주체가 되어 화려한 시간을 의식적으로 돌아보는 것. 방법 셋.

두 딸과 아빠간의 대화다. 큰 딸이 아빠에게 "왜 이렇게 했느냐"고 따진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작은 딸이 반박한다, "아빠 무슨 얘기냐"고, 또 아빠가 그런다 "네 말도 맞다"고. 이제 두 녀석이 동시에 그런다. "도대체 아빠는 왜 주관이 없냐"고 그럼 아빠가 또 그런다 "너네 말이 모두 맞다고" 이것이 '이순'이다. 모두 맞는 말, 그래서 주관이 사라진 나이, 귀가 순해지니 화날 일도 없어지는 나이,  그렇다고 절대 바보가 된 것이 아닌 나이, 어떤 말과 행동이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지를 아는 나이, 그래서 주변 사람이 보면 그냥 편한 노인이 되어가는 나이, 그러나 지혜와 학식이 가득해지는 나이, 참 산다는 것이 경이로움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윗집에서 세면대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도 이젠 적응됐으니 이순이 되어 가는 나이 같기도 하다. 아니면 완전히 그냥 늙어 가거나. 이제 무엇이든 이순하고 싶은 나이. 그 ‘주마등마저 수용해버리고 싶은 나이’이고 싶다.

비록 현대인의 삶이, 도시의 삶이 건조한 것 같아도, 그리고 시간이 미적대는 나이 앞에서 저 혼자 가버린 것 같아도, 한 잔의 커피를 음미하며, 한 올의 음율에서 행복을 보듬으며, 그리고 이젠 그 주마등마저 수용하여, 그리하여 결국은 '운명을 사랑했던 시간'이고 싶은 그런 아침이 그래도, 그럼에도 흘러가는 주마등 앞에 또 앉아 있다.

서울사이버대학교 김용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