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수필, 사색예찬‘ 2018. 2월호 -

< 양말 한 켤레로 부터의 단상 >

‘양말에서 구조주의 까지’

나이가 들면 누구나 비슷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다. 초저녁에 잠이 들고 잠시 자다 다시 일어나는 습관, 그러곤 한 참을 잠을 못 이루다가 다시 자다 깨다 그렇게 밤을 보내는, 오늘 또 한밤중에 일어나 하릴없어 기웃거리다 구멍 난 양말을 본다.

일전에 마트를 갔다가 만원에 양말 열 켤레를 샀다. 양말은 얇은 것만 신기 때문에 좀처럼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는데 이 양말은 미끄럽지도 않고 조이지도 않고 값도 싸고...해서 이만원어치를 샀다.

그리곤 거의 3년을 신은 것 같다. 그러나 요즘 양말마다 뒤쪽에 구멍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한다. 꼭 같이 뒤축만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 갈 때마다 그 양말코너에 들러보았지만 다시는 이런 양말은 팔지 않았다. 아까운 보석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이전처럼 꿰매어 신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어 그 양말 하나씩 구멍 발견할 때마다 아쉬움으로 때우고 만다. 그것들이 하나씩 닳아 갈 때 상실의 설움과 안타까움은 깨 크다.

익숙한 것들, 혹은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상실감, 그건 늙어가는 길어 만나는 것들이다. 젊을 땐 양말 아무것이나 신어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것들 또한 나이 들면서 수면습관처럼 바뀌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다.

세상에는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어쩌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대량생산되는 공산품들이야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들의 희소가치가 높아지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공산품들이 아닌 것은 모두 유일, 유니크(Unique)하다. 닭들을 키워보면 안다. 닭장에서 수천, 수만 마리가 양육되어 주야로 계란만 뽑아주다 몇 년 만에 사라지는 양계장의 닭들 또한 모두 개성이 다르고 사유(?)하는 머리를 갖고 있고, 또 정(情)이라는 것을 안다. 양계장 닭 중 몇마리만 가져다 키워보면 안다. 각자 성격이 다르고 성질도 다르고 습관과 행동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닭도 사랑하고 외로워하고 슬프하고 기뻐할 줄 안다는 것을, 시기 질투도 할 줄 안다는 것을, 주인 차 소리까지 식별하고 먹이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까지 안다는 것을.

이왕 닭 얘기 나왔으니 좀 더 덧붙여 볼까. 일전에 양평에서 닭을 몇 마리 키워 봤다. 동네 길에 승용차 아무리 많이 다녀도 모른 척 하다 주인 차가 오면 차 소리만 듣고도 모두 뛰어 나온다. 먹이 주러 온 것을 안다. 그리고 모이를 주면 장 닭은 먹지 앓고 암 닭들만 열심히 쪼아 먹는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다. 장 닭은 암 닭들이 먼저 먹기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무릇 생명들은 어쩌면 모두 온전한 존재다. 십년도 더 살 수 있는 닭들을 대량생산 대량소비하면서 현대 산업사회는 그것을 경쟁력이란 이름으로, 생산력이란 이름으로 오로지 그것들만이 기준을 삼는다. 이런 구조 위에 선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버티고 번성하고 경쟁하고 구조를 맞추어 간다.

여기서 '구조(構造)'는 모더니즘 사회에서 나타난 철학적, 언어학적 구조주의(Structuralism)와도 일맥상통하리라. 즉 구조가 우선이 되고 구조가 의식을 지배하는 사회, 의식이 먼저가 아니라 구조가 먼저인 사회, 그건 분명히 앞뒤가 바뀐 것 같지만 혜안을 가진 철학자들이 꼬집어 내기 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그건 분명히 왜곡되었으나 분별하지 못했던 구조주의의 '구조'말이다. 즉 계란 값이 경쟁력일 뿐 닭의 사랑과 질투, 닭의 슬픔과 분노 등을 우린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구조주의’ 말이다.

개성을 가진 오직 하나의 닭, 그런 것은 없다. 티비에서 가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닭 , 화장실변기에 올라가서 볼 일을 볼 줄 아는 신기한 티비의 닭 외에는... 그러나 양계장 수천마리 닭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구조주의란 얘기다. 라깡(Jacques Lacan), 소쉬르(Saussure, Ferdinand De)같은 이들이 어찌 언어를 통해 이런 구조주의의 이면을 밝혀냈는지는 놀랍다.

비록 그것이 양말 한 짝이라 해도 익숙한 것들이 사라질 때, 그 익숙함들이 습관적이고 당연하고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것들이 변경되고 변화될 때는 맘이 아리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 두거나 사귀던 이웃이 이사를 하거나 ...

동양이 발견한 최고의 철학은 아마도 역(易)이다. 유학의 철학적 혹은 진리적 접근, 그것이 주역(周易)이다. 모두 바뀌고 변한다는 것, 불교의 무상론(無想論)이요 기독교의 아침이슬이며 도교의 호접몽(胡蝶夢) 같은 것.

해서 인류는 구조를 꿰뚫고 슬픔을 초월하고자 늘 질문 앞에 섰다.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이 오온개공(五蘊皆空)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비상도(非常道) 비상명(非常名)이다. 그리고 이런 개체적 내적 승화보다도 아에 그것부터 거부해버린 것이 '예수진리'란 초월적 믿음일 지도 모를 일이다. 아쉬움과 애틋함과 슬픔을 넘어서는 것, 그 방법론에 대한 얘기 들이다.

그럼에도 그러므로 한 짝 양말에 대한 아쉬움을 우린 또 하나의 삶이 되고 느끼는 것, 영구적이지 않은 것들, 그것은 분명 절대적인 것의 파트너임에는 틀림없기에, 상대적인 것이 없으면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없기에, 인간이 없으면 어찌 신이 있겠고, 슬픔이 없으면 어찌 기쁨이 있으랴. 구멍난 양말 한 컬레를 놓고 이리 긴 밤을 지새면서 말이다. 삶 자체에 빠져있으면 이미 구조주의다. 닭의 온 생명을 모르는 것같이, 그러나 닭도 온전한 하나의 생명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이미 구조조의를 탈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아닐까. 이름하여 양말을 지나 닭을 온전히 바라보는 구조주의적 해체주의. 

2017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갔다. 어느 교수가 그랬다. "년도는 고유명사라는 것을 알았다"고, 달은 보통명사다. 년도는 유일한 하나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그것은 새로 다가오는 것들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금 곁에 있는 것들, 그것들이 모두 사랑이라는 의미다.

2018. 2

서울사이버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김용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