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을 위한 변명
- 철 지난 욕망 -

 

 지금 이 땅에서 중년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대중문화에서 밀려난 뒷방 세대? 자기 확신에 빠진 완고한 세대? 한 손에는 흘러가버린 세월을, 다른 한 손에는 그래도 남은 미련을 잡고, 그러나 나름 지난한 역사의 과정과 개인적 삶의 굴레를 절뚝거리며 지나온 이들…. 

 Y 출판사 대표를 만났다. 최단기간에 출판사를 선두 그룹으로 이끈 분, 50대. 너무 겸손해서 놀랐다. 인사는 90도, 회사 성공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두 가지란다. ‘배려(Consideration)’와 ‘기획(planning)’. 매주 기획 회의하고 직원 간의 배려가 회사 가치란다. 직원들 거의 사직 없단다. 종이 커피 잔 직접 치우고, 문 앞까지 나와 깍듯이 배웅하는 그 양반의 매력에 여하튼 깊이 빠졌다.

 50대!
 인터넷을 뒤져본다.
 “조급하게 살지 말자. 살 날 많다. 우물쭈물하다 먹은 나이, 50대를 위한 변명”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불편해도 참아내는 법, 필요한 것 있어도 없이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곱게 물든 가을은 봄보다 아름답다.”
 “빅토르 위고는 50대에 ‘레 미제라블’을 썼고, 레이 크록은 50대에 맥도날드를 창업했고. 길고 긴 날 30년의 경험을 쌓아서”
 이런 글도 있다. 

 ‘50대의 십계명’
 1) 일만 하지 마라. (일일이 따지지 마라)
 2) 이 일 저 일 끼어들지 마라. (이유를 묻지 마라)
 3) 삼삼오오 놀러 다녀라.
 4) 사생결단 하지 마라.
 5) 오케이를 많이 하라.
 6) 육체적 스킨십을 즐겨라.
 7) 70%면 만족하라.
 8) 팔팔하게 운동하라.
 9) 구차하게 변명하지 마라.
 10) 10%는 주변과 나눠라. 

 30세까지는 공부하고 인생 준비하느라 여리고 아름다운 시절을 바쁘게 보낸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학생 때도 즐거움과 놀기를 미뤄둘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약 오백 년이나 천 년쯤 된다면 30년 정도야 준비 기간으로 적당하겠지만 왕성하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이가 고작 60~70이라면 30년을 즐거움과 놀이를 포기하고 향후 인생 준비에만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전략(?)이다.
 결혼해서 우왕좌왕하다 보면 30대는 다 지나가고, 승진이다 뭐다 경쟁하다 보면 어느덧 40~50대인데 이 나이를 황혼이나 인생 후반이라 부른다. 언제 즐겁고 여유롭게 한번 살아보기라도 하고 인생 후반기냐고! 그러니까 50대는 가을이 아니라 억지(?) 여름이다. 

 60?!
 어느 날 갑자기 육십이 되었다. 싫든 좋든, 슬프든 기쁘든 미련이 있건 없건.
치과를 다녀왔다. 오른쪽 이빨 씌우고 나니 곧장 왼쪽 아랫니가 아프다. 이제 온전한 이가 거의 없다. 씌우고 때우고 뽑고…. 처음에는 치과에 가서 성질머리(?)도 냈다. 늘 오는데도 충치도 발견 못 하고 지갑에 돈만 빼간다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치과의 잘못이 아니다. 나이가 잘못이다. 저항력이 떨어져 충치를 박멸하지 못하니 수시로 자주 고장이 나는데 어쩌랴?
 어젯밤에는 어둠 내린 수락산을 올랐다. 하지에는 8시 반, 동지는 5시 반이면 어두워진다. 하지와 동지는 조석으로 낮의 시간이 3시간씩 차이, 하루 6시간 차이다. 꼭 조석으로 하루에 1분씩 길어진다.
 산을 오를 때까지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능선에 다다르니 어두워 앞이 안 보인다. 저 아래 도시의 불빛만 화려하다. 멀리 도시 외곽 순환도로에 길게 늘어선 차량 불빛이 꼭 산불이 난 것 같다. 하늘은 적갈색으로 점점 짙어가고 저 아래 도시의 불빛은 더욱 밝아온다. 이 산에는 멧돼지도 있다는데, 지난번에는 고라니도 있었는데, 깜깜한 밤중에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이 없다는데…. 젊어서 혈기가 넘칠 때도 아닌데 두려움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배짱이 있는 것일까? 

 점심때는 같이 육십 고개를 넘는 이 목사와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나 잘났다”고 남 비난해댄 것 모두 잘못된 건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남 비난하는 것 그것 모두 자기 정당성, 혹은 자기변명이었다고. 직장도, 고참도, 상사도 수용하고 수긍하는 것이 옳았다고, 타인을 부정하는 데서 자신의 긍정을 찾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고, 흠도 티도 없는 놈이 어디 있느냐고?
 정신병 혹은 우울증은 자기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 착한 자기를 가정해놓고 그것에 맞추지 못해서 자책이 누적되면 발생하는 것이라고, 성공한 자기를 가상해놓고 현실을 자꾸 부정하다 보면 그리되는 것 아니냐고…. 

 그냥 조금 나쁜 사람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못난 사람으로 그리 살면 안 되겠느냐고? 조금 무시당하며, 힘들며, 손해 보며, 아프며, 못난 것 수용하며, 못 이룬 것 안타까워하며, 그냥 그리 살면 어떻겠냐고.
 이 정도만 해도 잘했다고, 너무 자책하거나 주눅 들거나 의기소침해지거나 눈치 보거나 하지 말자고. 누구나 잘못은 조금씩 하고 사는 것, 누구나 흠과 티와 하자가 있는 것,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후배들의 공격에도 혹은 꼰대란 비아냥에도 나름 당당하자고, 그러나 너무 퇴화되지는 말자고, 우리 중년들도 지금까지 나름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전후 세대, 베이비 붐 세대로 태어나서 근대화의 중심에서 주역의 역할도 일정 부분 했다고, 이만큼이라도 경제 부흥을 이룬 것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 덕분이기도 하다고,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잘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진보는 보수를 골통이라고 공격하고 보수는 진보의 그 허황한 꿈을 유치하게 치부해도 그것들의 힘겨루기가 세상 사는 이치였고 경쟁과 발전의 원동력이었다고.
 다만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것과 관념론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비효율의 구조와 그런… 아직도 바꾸지 못한, 바꾸기 어려운 문제들을 남겨 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다고. 그러나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고, 지금도 이 사회의 끝을 잡고 지킬 것은 지키고 취할 것은 취하려고 무지 노력 중이라고.